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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하트마 간디 -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by 째즈밤 2016. 11. 24.


마하트마(위대한 혼) 간디(1869~1948)는 인도 민중들로부터 '파부지(아버지)'라고 불린 '인도 독립의 아버지'입니다. 이 위대한 영웅은 비폭력과 불복종 사상으로 수많은 인도인들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인도를 독립으로 이끌었습니다. 간디는 자식 교육을 학교에 의지하지 않았고, 인격 중심으로 교육을 시키려했습니다.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세운 실험 농장 '피닉스'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자급자족하던 시절,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조국 인도에 대한 배신이라며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에게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간디는 자녀들의 미래에 학교 교육이란 있을 수 없다며 유학의 길을 막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자식들을 교육시키기에 그는 정치적인 임무가 너무나 바빴습니다. 변호사인 간디는 다른 이들과의 평등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녀들의 길을 막았지만, 훗날 자서전을 통해 몹시 후회했습니다. 더구나 자식들의 미래를 막으면서까지 자신의 정치 도구로 이용했던 점을 깊이 후회했다고 합니다.


간디의 다섯 자녀 중 장남인 할리랄은 간디가 반대했던 결혼을 합니다. 또 학교 교육을 받고 변호사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는 간디의 뜻을 어겼지만 꼭 필요한 아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할리랄은 한때 '작은 간디'라고 불릴 만큼 충실하게 아버지를 따랐는데, 간디는 자신의 뜻을 어긴 그에게 지나칠 만큼 냉정하게 대했습니다. 할리랄은 아버지의 정치 노선을 실행하던 중 무허가로 과일을 팔았다는 이유로 붙잡히게 됩니다. 그 때 변호를 맡았던 간디가 법 앞에 불복종이란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할리랄이 구속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할리랄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그 즈음 아내의 죽음까지 겹쳐 거리의 부랑아로 전락하고 말게 됩니다. 이 후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암살 당한 간디의 다비식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위대한 인도의 아버지 간디가 세상을 떠난 반년 후, 작은 간디 할리랄도 몸바이의 한 요양소에서 폐결핵으로 고단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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