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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과 결혼 청첩장

by 째즈밤 2016. 11. 28.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


1897년 4월 18일, 우리 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이 '신식 결혼식'의 주인공은 조만수와 김륜시입니다. 신랑 조만수는 1899년 이화학당의 회계 겸 초대 서무주사를 지낸 인물로 1889년 이화학당에 입한한 김륜시를 신부로 맞아 들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에선 결혼하는 것이 곧 졸업이었습니다. 김륜시 역시 결혼과 동시에 9년간의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이들의 결혼에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당시 이화학당 학생의 배우자를 모두 선교사 선생이 골라 주었다는 것입니다. 혼수도 학당에서 모두 장만해 주었는데 신랑은 반드시 북감리교 신자여야 했다고 합니다. 조만수, 김륜시의 신식 결혼식은 그 절차나 장소, 분위기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학당에서 정식으로 승인한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기독교 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서구인들이 주관한 이 결혼식이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이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결혼 청첩장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를 보면 놀라운 광고가 눈에 띕니다. 바로 김우영과 나혜석이 결혼한다는 내용의 공개 청첩장입니다. 신랑인 김우영은 34세의 변호사로 딸까지 둔 기혼 남성인 반면, 신부인 나혜석은 당시 갓 24세의 미혼 여성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였습니다. 젊은 처녀 화가와 기혼의 변호사 결혼식에는 '천벌을 받아 죽을 놈', '미친년이 따로 있었구나'등의 여론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을 뒤로 하고 나혜석은 세 가지 조건을 내건 결혼을 감행합니다.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이 조건들을 쾌히 받아들인 김우영과 4남매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11년째 파리 여행에서 최린과 염문을 퍼뜨려 이혼 당하고 말게됩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취미'라 말하고, 도리어 최린에게 위자료까지 청구한 나혜석은 당시로서 보기 드문 진보 여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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